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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무엇인가? - 에르네스트 르낭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 나에게는 매우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프랑스 국민 중에서 에르네스트 르낭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프랑스인 모두가 르낭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르낭의 저작들 하나 하나가 상당한 분량에다가 내용까지 그리 쉽지 않아, 실제로 그의 저작을 완독한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제 목 : 에르네스트 르낭 - 민족이란 무엇인가
시리즈 : 책세상 문고 - 고전의 세계 01
지은이 : 에르네스트 르낭 / 신행선 옮김
펴낸곳 : 책세상 (초판 출간일 2002.1.1 | 2004년 1월 25일 초판 3쇄를 읽음) ₩4,900
르낭을 추종하는 이들의 성향은 매우 다양하다. "자유사상가, 비성직주의자에서부터 지극히 종교적인 사고의 소유자들까지, 공화주의자에서부터 귀족주의자, 왕정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를 신봉하는 자들의 스펙트럼은 이례적으로 폭넓다."
그러나, 나는 겨우 이제 처음으로 르낭의 이름을 들었고,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얇다고 하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어떠한지, 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옮긴이가 책 말미에 써놓은 〈해제〉부분을 통해 조금 이해할 뿐이다.
'민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한 때 매우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민족통일'과 '민중해방'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를 마치 절대절명의 목표처럼 삼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민중'과 '민족'과 '노동'의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찾고자 했던 그 단어의 뜻은 앞으로도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 같다. '민족'과 '민중'과 '노동' 자체의 의미에서 출발하여, 이를 '통일'하고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코 지속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처럼 모호한 것이 세상에 또 없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이 뒷받침되지 않은, 이 말 장난들은 결코 민족을 통일시키거나 민중을 해방시킬 수가 없다. '말' 그 자체는 결코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주는 단호함과는 달리, 르낭이 말하는 민족의 개념 역시 완전하지는 않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민족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그것들이 잘못되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의 의견이 조금 들어 있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말하는 민족의 핵심은 '의지'이다. 종족, 인종, 왕족, 언어, 문화, 지리적 요건들은 모두 하나같이 민족을 규정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는 언어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지입니다(p.73)"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민족은 토지라는 외형에 의해 결정된 집단이 아니라 역사의 깊은 분규의 결과로 생긴 정신적 원칙이며 영적인 가족으로서의 집단(p.79)"라고 한다. 따라서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p.81)"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민족을 위해 희생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 바로 민족이라는 것이다.
민족을 인종과 종족, 혈연 등 인종학이나 고고학적으로 판단하여 순수 혈통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는 매우 훌륭한 텍스트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이 글이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간의 전쟁(보불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난 후에 씌어졌음을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글이,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사람들에게 어느 나라(민족)에 속하고 싶은지를 직접 물어봐야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제 목 : 에르네스트 르낭 - 민족이란 무엇인가
시리즈 : 책세상 문고 - 고전의 세계 01
지은이 : 에르네스트 르낭 / 신행선 옮김
펴낸곳 : 책세상 (초판 출간일 2002.1.1 | 2004년 1월 25일 초판 3쇄를 읽음) ₩4,900
르낭을 추종하는 이들의 성향은 매우 다양하다. "자유사상가, 비성직주의자에서부터 지극히 종교적인 사고의 소유자들까지, 공화주의자에서부터 귀족주의자, 왕정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를 신봉하는 자들의 스펙트럼은 이례적으로 폭넓다."그러나, 나는 겨우 이제 처음으로 르낭의 이름을 들었고, 그의 책 중에서 가장 얇다고 하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어떠한지, 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옮긴이가 책 말미에 써놓은 〈해제〉부분을 통해 조금 이해할 뿐이다.
'민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한 때 매우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민족통일'과 '민중해방'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를 마치 절대절명의 목표처럼 삼고 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민중'과 '민족'과 '노동'의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찾고자 했던 그 단어의 뜻은 앞으로도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 같다. '민족'과 '민중'과 '노동' 자체의 의미에서 출발하여, 이를 '통일'하고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코 지속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처럼 모호한 것이 세상에 또 없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이 뒷받침되지 않은, 이 말 장난들은 결코 민족을 통일시키거나 민중을 해방시킬 수가 없다. '말' 그 자체는 결코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주는 단호함과는 달리, 르낭이 말하는 민족의 개념 역시 완전하지는 않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민족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그것들이 잘못되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의 의견이 조금 들어 있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말하는 민족의 핵심은 '의지'이다. 종족, 인종, 왕족, 언어, 문화, 지리적 요건들은 모두 하나같이 민족을 규정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는 언어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지입니다(p.73)"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민족은 토지라는 외형에 의해 결정된 집단이 아니라 역사의 깊은 분규의 결과로 생긴 정신적 원칙이며 영적인 가족으로서의 집단(p.79)"라고 한다. 따라서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p.81)"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민족을 위해 희생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 바로 민족이라는 것이다.
민족을 인종과 종족, 혈연 등 인종학이나 고고학적으로 판단하여 순수 혈통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는 매우 훌륭한 텍스트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이 글이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간의 전쟁(보불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기고 난 후에 씌어졌음을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글이,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사람들에게 어느 나라(민족)에 속하고 싶은지를 직접 물어봐야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부록

댓글 2
원인이 있다. 주말의 연이은 상가(喪家) 방문이 생리적인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고, 근래 다시 헝클러지기 시작한 생활리듬에 대한 회의와 어젯밤의 충격적인 사건이 심리적인 원인
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어젯밤 김선일씨 사망소식을 처음 접한 것도 새벽녘이었다. 2시가 다될 무렵, 졸린 눈을 비비며 '리처드 파인만'의 최근간 <파인만의 또다른 물리이야기>를 탐닉하며 하필 컴퓨터를
켜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수학과 물리학의 기초가 부실한 내가 물리학 전공학생들도 어려워한다는 '벡터'(기호)를 활용한 '물리학적 대칭성'에 대해 읽고 있었으니, 그건 차라리 독서라기보다 불면증과의 사투
였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그 무렵 컴퓨터가 신호를 보내왔다. "큰일 났다고, 빨리 다가와서 내용을 확인해 보라고..." 그리고 다시 "불면의 나락으로 빠져들라"고.
다시 새벽을 맞은 지금 무망의 시선을 컴퓨터 화면에 고정시킨다. 그러다 문득 네 이름을 떠올린다. 오늘은 병목이가 무슨 책을 읽고 어떻게 서평을 써놨을까.
자판에 손을 올리고 '손병목'을 쳤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화면에 나타난 글자는 '손병목'이 아니라 '김선일'이었다. 거짓말처럼 나는 '손병목' 대신 '김선일'을 치고 말았다. 네 홈피에 들어와 글을 읽고 있는 와중에도 내 머리 속에선 여전히 '김.선.일.'이라는 글자의 잔영이 춤을 추고 있다. 김선일씨의 처참한 죽음은 이미 현실 이상의 의미로 승화되었다. 어느덧 그의 주검 앞에는 민족 혹은 국가라는 관념어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신 리뷰가 하필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인 것도 공교롭다. 내게도 낯설기만 한 르낭이 이미 2세기 전에 "민족은 '영토'나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라고 했던 것
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알자스와 로렌 지방 사람들의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 했던 르망의 민족론은 2004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리처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가 당대를 살
았던 학생들 뿐 아니라 현재의 물리학도들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강의이듯이 말이다.
원래는 르낭의 서평보다는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그리고 누구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합니다. 한 인간에 대한 슬픔 뒤에 현 정권에 대한 회의가 따라옵니다. 이 두가지 모두 제게는 참 괴로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