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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10] 공자 이야기 (2)
공자 학원 전성시대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그의 인품과 학문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뚫고 나오는 법입니다. 공자 나이 서른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식을 보내 배우게 합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학원에 자식들을 서로 보내려는 부모의 마음이었겠지요. 그렇게 공자 학원은 서서히 커져갑니다. 노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그 명성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자로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공자가 어떻게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는지, 자로의 예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자로는 건달 출신입니다. 그러다가 공자의 인품에 반해 스스로 공자의 제자가 됩니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공자가 14년 동안이나 천하를 유랑할 때 항상 그 곁에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로는 스승 공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습니다. 때로는 공자에게 대들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는 한 번도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귀국 후 자로는 공자의 곁을 떠나 위나라 대부 공회라는 사람의 식읍을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공회가 위나라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붙잡혀 곧 죽게 되는 상황까지 갑니다. 자로는 홀로 그 위험한 곳으로 잠입해서 큰 소리를 칩니다. “공회를 풀어 놓아라!” 그러나 곧 날쌘 자객 두 사람의 칼을 맞고 쓰러집니다. 머리에 썼던 갓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순간 그는 최후를 직감했습니다. 여기서 죽는구나. 그는 떨어진 갓을 다시 쓰고 단정하게 갓끈을 매며 말합니다.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 그리고 최후의 칼이 그의 심장을 찔렀을 것입니다.
유교의 고지식함을 비꼬는 말로 쓰는 저 말이, 실은 이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행복하게 정리하며 뱉은 비장한 한 마디였습니다. 내 비록 죽지만, 이제야 군자가 무엇인지 알겠다, 이제야 나는 군자다, 비록 지금 죽지만 군자로서 갓끈을 묶은 채로 행복하게 죽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습니다. 다시는 저 말을 장난삼아 냉소조로 얘기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습니다.
교육계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사의 자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 최고의 스승을 둔 제자들 역시 그 면면이 뛰어났습니다. 자로뿐만 아니라 공자에게는 훌륭한 제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스승의 말을 기억하여 기록하고,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제자를 가르칩니다. 공자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다 우수한 제자들을 길러낸 때문입니다.
삼십 대 중반에 그는 주나라에 잠깐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주나라의 현재 모습을 보며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노자를 만났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당시 노자|老子|는 말 그대로 노인네였습니다. 노자가 보기에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공자의 의욕이 측은해보였나 봅니다. 노자는 공자에게 옛 사람들이 남긴 죽은 말들을 구애되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는 참다운 현자는 그 재능을 속에 깊숙이 감추고 함부로 현자인 체하지 않으니 겉으로는 마치 어리석어 보인다고 덧붙입니다. 너무 아는 체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일 겁니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간신히 겨우살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라고 일러둡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새가 잘 날고, 고기가 잘 헤엄치고, 짐승이 잘 달리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낚을 수 있다. 날아가는 것은 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풍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노자는 한 마리 용과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일이 있고부터 공자 학원의 수강생이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공자 학원 전성시대였습니다.
공자, 노나라를 떠나다
그러나 아무리 학원생 수가 많아도 그의 마음은 늘 허전했습니다. 사설 학원장으로 명성을 날리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일평생 소원은 주나라 초기의 문물제도, 곧 주나라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존재했던 이름뿐인 주나라를 다시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그 문화를 제대로 배워 계승 발전시키고 싶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원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원장을 써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노나라에서 꿈을 펼치고 싶건만 제대로 알아보고, 그 능력을 써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공자도 제나라로 떠납니다. 물론 제자가 서너 명 따라붙었을 것입니다. 임금이 떠났다고 함께 떠난 건 아닙니다. 노나라에 있어봤자 자신을 불러줄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고사는 이 때 만들어졌습니다. 제자들과 제나라로 가던 중에 무덤 앞에서 흐느끼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다가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모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무서운 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 여인네 말하기를, 이곳에는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는 있지만 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고 노역을 심하게 시키는 못된 벼슬아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공자가 제자에게 한 말이,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사는 <예기>에 나오는 것인데,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제나라로 간 공자는 제나라 임금인 경공|景公|을 만나보려 합니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된 모양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했건만, 공자의 바람처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를 <사기>에서는, 공자가 음악에 심취해서 세 달 동안 고기 맛을 잃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공자가 음악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남의 나라에 가서 세 달 동안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만나고는 싶은데 불러주질 않으니 집에서 음악이나 듣고 있었던 건 아닌지.
(공자 이야기, 내일 또 이어집니다...)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여 그의 인품과 학문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뚫고 나오는 법입니다. 공자 나이 서른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식을 보내 배우게 합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학원에 자식들을 서로 보내려는 부모의 마음이었겠지요. 그렇게 공자 학원은 서서히 커져갑니다. 노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그 명성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자로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공자가 어떻게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는지, 자로의 예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자로는 건달 출신입니다. 그러다가 공자의 인품에 반해 스스로 공자의 제자가 됩니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공자가 14년 동안이나 천하를 유랑할 때 항상 그 곁에 있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로는 스승 공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습니다. 때로는 공자에게 대들기도 하고, 심술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는 한 번도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귀국 후 자로는 공자의 곁을 떠나 위나라 대부 공회라는 사람의 식읍을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공회가 위나라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붙잡혀 곧 죽게 되는 상황까지 갑니다. 자로는 홀로 그 위험한 곳으로 잠입해서 큰 소리를 칩니다. “공회를 풀어 놓아라!” 그러나 곧 날쌘 자객 두 사람의 칼을 맞고 쓰러집니다. 머리에 썼던 갓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순간 그는 최후를 직감했습니다. 여기서 죽는구나. 그는 떨어진 갓을 다시 쓰고 단정하게 갓끈을 매며 말합니다.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 없다!” 그리고 최후의 칼이 그의 심장을 찔렀을 것입니다.
유교의 고지식함을 비꼬는 말로 쓰는 저 말이, 실은 이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행복하게 정리하며 뱉은 비장한 한 마디였습니다. 내 비록 죽지만, 이제야 군자가 무엇인지 알겠다, 이제야 나는 군자다, 비록 지금 죽지만 군자로서 갓끈을 묶은 채로 행복하게 죽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울컥 쏟아졌습니다. 다시는 저 말을 장난삼아 냉소조로 얘기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했습니다.
교육계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사의 자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 최고의 스승을 둔 제자들 역시 그 면면이 뛰어났습니다. 자로뿐만 아니라 공자에게는 훌륭한 제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은 스승의 말을 기억하여 기록하고,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제자를 가르칩니다. 공자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다 우수한 제자들을 길러낸 때문입니다.
삼십 대 중반에 그는 주나라에 잠깐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주나라의 현재 모습을 보며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노자를 만났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당시 노자|老子|는 말 그대로 노인네였습니다. 노자가 보기에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공자의 의욕이 측은해보였나 봅니다. 노자는 공자에게 옛 사람들이 남긴 죽은 말들을 구애되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는 참다운 현자는 그 재능을 속에 깊숙이 감추고 함부로 현자인 체하지 않으니 겉으로는 마치 어리석어 보인다고 덧붙입니다. 너무 아는 체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일 겁니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간신히 겨우살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라고 일러둡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새가 잘 날고, 고기가 잘 헤엄치고, 짐승이 잘 달리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낚을 수 있다. 날아가는 것은 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풍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노자는 한 마리 용과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일이 있고부터 공자 학원의 수강생이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공자 학원 전성시대였습니다.
공자, 노나라를 떠나다
그러나 아무리 학원생 수가 많아도 그의 마음은 늘 허전했습니다. 사설 학원장으로 명성을 날리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일평생 소원은 주나라 초기의 문물제도, 곧 주나라 문화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존재했던 이름뿐인 주나라를 다시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그 문화를 제대로 배워 계승 발전시키고 싶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원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원장을 써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노나라에서 꿈을 펼치고 싶건만 제대로 알아보고, 그 능력을 써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공자도 제나라로 떠납니다. 물론 제자가 서너 명 따라붙었을 것입니다. 임금이 떠났다고 함께 떠난 건 아닙니다. 노나라에 있어봤자 자신을 불러줄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고사는 이 때 만들어졌습니다. 제자들과 제나라로 가던 중에 무덤 앞에서 흐느끼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다가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이 모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무서운 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 여인네 말하기를, 이곳에는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는 있지만 세금을 혹독하게 물리고 노역을 심하게 시키는 못된 벼슬아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공자가 제자에게 한 말이,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사는 <예기>에 나오는 것인데,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제나라로 간 공자는 제나라 임금인 경공|景公|을 만나보려 합니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된 모양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했건만, 공자의 바람처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이야기를 <사기>에서는, 공자가 음악에 심취해서 세 달 동안 고기 맛을 잃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공자가 음악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남의 나라에 가서 세 달 동안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만나고는 싶은데 불러주질 않으니 집에서 음악이나 듣고 있었던 건 아닌지.
(공자 이야기, 내일 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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