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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의 성공 스토리
출처 : 레이디 경향 2005-11-09
“희망이 에너지이듯 분노 또한 에너지였습니다”
고3 때 미국을 대표하는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이승복씨. 그는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다. 청천벽력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세계 최고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수석 전공의가 된 이승복씨의 성공 신화.
불굴의 의지가 때론 기적을 만든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라고 생각하지만, 기적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지마비 장애를 딛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공의가 된 ‘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씨(40)가 우리에게 주는 깨우침이 바로 그것이다.
학창 시절 이승복씨는 촉망받는 체조선수였다. 고3 때 미국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그는 UCLA, 미시간대, 스탠퍼드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웨스트포인트 군사학교 등 유명 체조팀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런 그가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C7-C8 종결 선언’을 받았다. 그것은 일곱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체조는 나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는 운동 이상의 의미
체조는 그에게 운동 이상의 의미였다. ‘국가대표 체조선수 이승복’에 대한 꿈은 그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여덟 살 때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약사이던 그의 아버지가 약국 생활을 답답해한데다 당시 가족 이민 붐에 힘입어 이승복씨 가족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
“한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부모님은 미국에 가면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화목한 가정이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님은 언제나 바빴고, 언어 문제에 인종 차별까지 당해야 하던 저는 어린 나이에 여러 면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장남으로서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운동선수로 성공하면 부모님의 사랑도 되찾고 한국에서처럼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절 놀린 미국 아이들의 코도 납작하게 해줄 수 있다고 여겼구요.”
초등학생 시절 체조선수의 경기 장면을 보고 그는 첫눈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특히 그에게 감동을 준 체조선수가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다. 경기마다 10점 만점을 받는 그녀를 보고 어린 마음에 그는 금메달을 따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가족, 고국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은 그의 유일한 꿈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 훈련 도중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이승복씨. 그는 그것이 인생 최대의 고비인지도 모른 채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오로지 훈련소 복귀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입원한 지 3개월 무렵, 의사가 그에게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그는 절망했고 또 분노했다.
“제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다시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실망스럽고 화가 났어요. 그러나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어요. 만약 제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총기사고 때문에 척추 손상을 입었다면 평생 그 분노를 그들을 미워하는 데 허비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다친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제 잘못이었어요. 올림픽 한국 대표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코치의 말에 제가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오르다 일어난 사고였거든요. 분노를 쏟아낼 대상은 제 눈앞에 놓인 현실, 재활 훈련밖에 없었죠. 희망이 에너지이듯 분노 또한 에너지가 되더라구요.”
그는 재활 훈련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그는 일찍 일어나 간호 조무사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그는 혼자서 병원 곳곳을 누빌 수 있었고, 가능한 근육을 거의 모두 쓸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은 “환자 중에서 이렇게 재활 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본다”고 말했을 정도.
의사가 되고서 자랑스러워진 장애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의학 서적과 씨름했다. 어느 날 조무사가 건넨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는 의학 공부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어려운 의학 서적들과 달리 쉽게 쓰인 그 책을 읽으며 자신이 치러야 한 고통스러운 재활 훈련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단다. 특히 의학의 많은 분야가 육체의 상처 치료에만 초점이 맞춰진 데 반해, 재활의학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생명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까지 두루 관여하는 학문임을 알았다고.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권위적인 태도 또한 그가 의사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 그는 의사들이 환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고, 의무적이고 딱딱하게 환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고 한다. 다른 환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환자가 원하는 의사’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다지 좋은 머리도 아니고, 체조선수일 때도 공부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는 그가 공부를 하겠다고 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겠다고 결단을 내린 순간 한숨이 나왔어요. 공부가 쉬운 것도 아닐뿐더러 저한테 맞지도 않았거든요. 앞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니 한숨이 나올 밖에요.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먹고 덤벼들긴 했지만 힘든 길이었어요. 힘들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그만 두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눈물도 많이 흘렸고 동창이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어요.”
그가 의대를 다닐 때 근처에 있는 한인교회 교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방으로 돌아오면 문 밖에 저녁식사가 놓여 있곤 했다. 교포들이 갖다놓은 도시락에는 격려의 쪽지도 담겨 있었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챙기고 격려해준 교포들에 대한 고마움을 그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몸에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그는 남들보다 두세 배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다. 남이 4시간 공부할 때 그는 8시간 공부했고, 남보다 두세 시간 덜 잤다. 그 스스로도 “보통 의대생보다 좀더 힘든 의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체조선수 시절 쏟은 열정으로 학업에 매진한 결과, 그는 첫 목표이던 뉴욕대에 입학한다. 뉴욕대 졸업 후 콜럼비아대 공중보건학 석사를 마쳤고, 명문 다트머스대에서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시작, 하버드 의대에서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인정하는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된 것. 그는 미국 내 단 두 명뿐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환자들에게 단순한 의사가 아니다. 마음을 보듬는 진정한 치유자다. 척추 손상 장애로 절망한 환자들은 약과 재활 훈련을 거부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자해를 하기도 한다. 그런 환자들을 감당하지 못할 때면 동료 의사들은 이승복씨를 찾곤 한다. 두세 달 동안 어떤 의사도 설득하지 못한 환자의 마음을 그가 연다. 그가 같은 아픔을 겪고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존스 홉킨스 병원에 온 이후 그는 장애를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의대 시절이나 인턴 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장애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품었다. 장애가 자신을 의학의 길로 이끌었지만, 장애로 인해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
“육체적인 핸디캡 속에서 더 힘들게 공부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해내는 의료 실습에서도 늘 서너 발짝 뒤처져 쫓아가야 했어요. 남들에게 뒤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미안함이 늘 따라다녔죠. ‘장애만 아니었으면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쉬웠을까 장애만 아니었으면….’ 수없이 많은 날을 그렇게 보냈어요.”
이승복씨는 이제 장애로 인해 환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이것으로 자신의 장애에 대한 오랜 마음의 굴레를 훌훌 벗어던졌다는 그는 “전 존스 홉킨스 재활병동 척수신경과의 사지마비 장애인 이승복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장애가 자랑스럽다.
“나는 코리언 아메리칸이 아니라 코리언”
자신의 현재가 장애인들의 미래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라면 그는 뭐든 하고 싶다고 말한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을 낸 것도 다르지 않은 이유. 그는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태릉선수촌을 방문한 날 그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전 체조 국가대표 김소영 선수가 평행봉 연기를 펼치는 코마네치의 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를 선물한 것다. 김소영 선수는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86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훈련중 추락해 1급 지체 장애인이 된 김소영 선수는 그와 같은 운명을 겪었다. 사고 후 이승복씨는 김소영 선수의 팬이 되었는데, 그가 다쳤다는 것을 알고 이승복씨가 연락을 취했단다. 그때부터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예요. 원고 완성한 뒤 소영이에게 읽어달라고 했어요. 원고 읽고 소영이가 ‘오빠 이거 진짜 내 이야기야. 나중에 내가 책 쓰면 오빠 책 갖다주면 되겠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입국하기 전날 소영이가 출국해서 한국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제가 태릉선수촌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에 액자를 맡겨놨더라구요. 저에게 제일 의미 있는 선물이었어요.”
당당하고, 고집 세고, 자신이 원하는 건 해내고 마는 이승복씨의 똑 부러지는 성격은 어머니 정보숙씨(64)를 닮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독립적이고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 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4년 전 중풍에 걸려 그와 마찬가지로 휠체어를 탄다. 활동적이고, 항상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던 어머니는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기자들이 직업을 물을 때마다 언제나 ‘하우스와이프’라고 답한다. 어머니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든든한 동반자다.
“항상 사이 좋고 사랑스러운 모자간은 아닙니다.(웃음) 화나고 답답할 때 서로에게 짜증 낼 때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전 둘 다 장애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서로 좀더 이해하고 사이 좋게 지내자고 얘기하곤 해요. 모자일 뿐만 아니라 친구로, 좋은 룸메이트로 어려움을 해결해나가자고 그러죠. 어머니는 가족 중에 저와 가장 친하고 가까운 분이에요.”
교포들이 ‘코리언 아메리칸’이라고 얘기할 때 이승복씨는 항상 ‘코리언’이라고 말했고, 미국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동생들에게 그는 매번 ‘형’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지금도 그는 ‘로버트’보다 ‘이승복’이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사랑이 남다른 그는 앞으로도 한국에서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장애인을 위한 환경과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얼마 전 한 장애인 시설을 방문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낙후된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을 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한 이승복씨가 잠깐 인터뷰를 중단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만 좋은 나라에서 좋은 것 누리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또 화가 났어요. 미국 사람들이 그곳을 봤다면 아마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했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구요. 욕실, 침실… 모든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고, 차가 없으면 꼼짝하지 못할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을 보면서 화가 났어요. 장애인 시설이라면 장애인 스스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와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이었어요.”
그는 한국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냉대받는 장애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고 했다. 또 기회가 되면 한국 국가대표팀 담당의사로 일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누린 많은 것을 그는 고스란히 고국에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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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에너지이듯 분노 또한 에너지였습니다”
고3 때 미국을 대표하는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이승복씨. 그는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다. 청천벽력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세계 최고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수석 전공의가 된 이승복씨의 성공 신화.
불굴의 의지가 때론 기적을 만든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라고 생각하지만, 기적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지마비 장애를 딛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공의가 된 ‘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씨(40)가 우리에게 주는 깨우침이 바로 그것이다. 학창 시절 이승복씨는 촉망받는 체조선수였다. 고3 때 미국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그는 UCLA, 미시간대, 스탠퍼드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웨스트포인트 군사학교 등 유명 체조팀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런 그가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C7-C8 종결 선언’을 받았다. 그것은 일곱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체조는 나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는 운동 이상의 의미
체조는 그에게 운동 이상의 의미였다. ‘국가대표 체조선수 이승복’에 대한 꿈은 그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여덟 살 때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약사이던 그의 아버지가 약국 생활을 답답해한데다 당시 가족 이민 붐에 힘입어 이승복씨 가족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
“한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부모님은 미국에 가면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화목한 가정이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님은 언제나 바빴고, 언어 문제에 인종 차별까지 당해야 하던 저는 어린 나이에 여러 면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장남으로서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운동선수로 성공하면 부모님의 사랑도 되찾고 한국에서처럼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절 놀린 미국 아이들의 코도 납작하게 해줄 수 있다고 여겼구요.”
초등학생 시절 체조선수의 경기 장면을 보고 그는 첫눈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특히 그에게 감동을 준 체조선수가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다. 경기마다 10점 만점을 받는 그녀를 보고 어린 마음에 그는 금메달을 따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가족, 고국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은 그의 유일한 꿈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 훈련 도중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한 이승복씨. 그는 그것이 인생 최대의 고비인지도 모른 채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오로지 훈련소 복귀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입원한 지 3개월 무렵, 의사가 그에게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얘기했을 때 그는 절망했고 또 분노했다. “제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다시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실망스럽고 화가 났어요. 그러나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어요. 만약 제가 타인의 잘못으로 인한 교통사고나 총기사고 때문에 척추 손상을 입었다면 평생 그 분노를 그들을 미워하는 데 허비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다친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제 잘못이었어요. 올림픽 한국 대표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코치의 말에 제가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코치의 말을 어기고 혼자서 마루를 향해 뛰어오르다 일어난 사고였거든요. 분노를 쏟아낼 대상은 제 눈앞에 놓인 현실, 재활 훈련밖에 없었죠. 희망이 에너지이듯 분노 또한 에너지가 되더라구요.”
그는 재활 훈련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물리치료 시간이 되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그는 일찍 일어나 간호 조무사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그는 혼자서 병원 곳곳을 누빌 수 있었고, 가능한 근육을 거의 모두 쓸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은 “환자 중에서 이렇게 재활 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본다”고 말했을 정도.
의사가 되고서 자랑스러워진 장애
자신의 몸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의학 서적과 씨름했다. 어느 날 조무사가 건넨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는 의학 공부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어려운 의학 서적들과 달리 쉽게 쓰인 그 책을 읽으며 자신이 치러야 한 고통스러운 재활 훈련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단다. 특히 의학의 많은 분야가 육체의 상처 치료에만 초점이 맞춰진 데 반해, 재활의학은 육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생명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까지 두루 관여하는 학문임을 알았다고.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권위적인 태도 또한 그가 의사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 그는 의사들이 환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고, 의무적이고 딱딱하게 환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고 한다. 다른 환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환자가 원하는 의사’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다지 좋은 머리도 아니고, 체조선수일 때도 공부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는 그가 공부를 하겠다고 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겠다고 결단을 내린 순간 한숨이 나왔어요. 공부가 쉬운 것도 아닐뿐더러 저한테 맞지도 않았거든요. 앞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니 한숨이 나올 밖에요.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먹고 덤벼들긴 했지만 힘든 길이었어요. 힘들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그만 두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눈물도 많이 흘렸고 동창이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어요.”그가 의대를 다닐 때 근처에 있는 한인교회 교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방으로 돌아오면 문 밖에 저녁식사가 놓여 있곤 했다. 교포들이 갖다놓은 도시락에는 격려의 쪽지도 담겨 있었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챙기고 격려해준 교포들에 대한 고마움을 그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몸에 손으로 글씨조차 쓰기 힘들었지만, 그는 남들보다 두세 배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다. 남이 4시간 공부할 때 그는 8시간 공부했고, 남보다 두세 시간 덜 잤다. 그 스스로도 “보통 의대생보다 좀더 힘든 의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체조선수 시절 쏟은 열정으로 학업에 매진한 결과, 그는 첫 목표이던 뉴욕대에 입학한다. 뉴욕대 졸업 후 콜럼비아대 공중보건학 석사를 마쳤고, 명문 다트머스대에서 본격적인 의학 공부를 시작, 하버드 의대에서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인정하는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된 것. 그는 미국 내 단 두 명뿐인 사지마비 장애인 의사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환자들에게 단순한 의사가 아니다. 마음을 보듬는 진정한 치유자다. 척추 손상 장애로 절망한 환자들은 약과 재활 훈련을 거부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자해를 하기도 한다. 그런 환자들을 감당하지 못할 때면 동료 의사들은 이승복씨를 찾곤 한다. 두세 달 동안 어떤 의사도 설득하지 못한 환자의 마음을 그가 연다. 그가 같은 아픔을 겪고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존스 홉킨스 병원에 온 이후 그는 장애를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의대 시절이나 인턴 과정을 밟을 때만 해도 장애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품었다. 장애가 자신을 의학의 길로 이끌었지만, 장애로 인해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
“육체적인 핸디캡 속에서 더 힘들게 공부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해내는 의료 실습에서도 늘 서너 발짝 뒤처져 쫓아가야 했어요. 남들에게 뒤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미안함이 늘 따라다녔죠. ‘장애만 아니었으면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쉬웠을까 장애만 아니었으면….’ 수없이 많은 날을 그렇게 보냈어요.” 이승복씨는 이제 장애로 인해 환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이것으로 자신의 장애에 대한 오랜 마음의 굴레를 훌훌 벗어던졌다는 그는 “전 존스 홉킨스 재활병동 척수신경과의 사지마비 장애인 이승복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장애가 자랑스럽다.
“나는 코리언 아메리칸이 아니라 코리언”
자신의 현재가 장애인들의 미래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라면 그는 뭐든 하고 싶다고 말한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을 낸 것도 다르지 않은 이유. 그는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태릉선수촌을 방문한 날 그는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전 체조 국가대표 김소영 선수가 평행봉 연기를 펼치는 코마네치의 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를 선물한 것다. 김소영 선수는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86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훈련중 추락해 1급 지체 장애인이 된 김소영 선수는 그와 같은 운명을 겪었다. 사고 후 이승복씨는 김소영 선수의 팬이 되었는데, 그가 다쳤다는 것을 알고 이승복씨가 연락을 취했단다. 그때부터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화 통화도 자주 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예요. 원고 완성한 뒤 소영이에게 읽어달라고 했어요. 원고 읽고 소영이가 ‘오빠 이거 진짜 내 이야기야. 나중에 내가 책 쓰면 오빠 책 갖다주면 되겠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입국하기 전날 소영이가 출국해서 한국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제가 태릉선수촌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에 액자를 맡겨놨더라구요. 저에게 제일 의미 있는 선물이었어요.”
당당하고, 고집 세고, 자신이 원하는 건 해내고 마는 이승복씨의 똑 부러지는 성격은 어머니 정보숙씨(64)를 닮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독립적이고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 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가 4년 전 중풍에 걸려 그와 마찬가지로 휠체어를 탄다. 활동적이고, 항상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던 어머니는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기자들이 직업을 물을 때마다 언제나 ‘하우스와이프’라고 답한다. 어머니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해준 든든한 동반자다.
“항상 사이 좋고 사랑스러운 모자간은 아닙니다.(웃음) 화나고 답답할 때 서로에게 짜증 낼 때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전 둘 다 장애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서로 좀더 이해하고 사이 좋게 지내자고 얘기하곤 해요. 모자일 뿐만 아니라 친구로, 좋은 룸메이트로 어려움을 해결해나가자고 그러죠. 어머니는 가족 중에 저와 가장 친하고 가까운 분이에요.”
교포들이 ‘코리언 아메리칸’이라고 얘기할 때 이승복씨는 항상 ‘코리언’이라고 말했고, 미국식으로 이름을 부르는 동생들에게 그는 매번 ‘형’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지금도 그는 ‘로버트’보다 ‘이승복’이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사랑이 남다른 그는 앞으로도 한국에서 많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특히 장애인을 위한 환경과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얼마 전 한 장애인 시설을 방문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낙후된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을 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한 이승복씨가 잠깐 인터뷰를 중단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만 좋은 나라에서 좋은 것 누리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또 화가 났어요. 미국 사람들이 그곳을 봤다면 아마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했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구요. 욕실, 침실… 모든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고, 차가 없으면 꼼짝하지 못할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을 보면서 화가 났어요. 장애인 시설이라면 장애인 스스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와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이었어요.”
그는 한국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냉대받는 장애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고 했다. 또 기회가 되면 한국 국가대표팀 담당의사로 일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누린 많은 것을 그는 고스란히 고국에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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